미메시스, 자서전 쓰기의 새로운 창을 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글로 써 내려가면서 어떤 감정을 느낄까요? 과거를 회상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현재를 돌아보며 감사와 후회를 교차로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탄생하는 것이 바로 자서전입니다. 그런데 자서전을 쓰는 행위 자체를 고대 철학에서 말하는 '미메시스(mimesis)', 즉 모방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미메시스: 삶을 그려내는 창작의 도구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예술과 문학의 핵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미메시스는 현실을 단순히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사물이나 사건의 의미를 추출하고 이를 재구성하는 창의적인 작업입니다. 여기서 '본질'은 단순한 사실 너머에 존재하는 깊은 의미나 삶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라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거나, 개인의 일화에서 인간 본성을 드러내는 방식이 이에 해당합니다. 자서전 쓰기 역시 이와 닮아 있습니다.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순간들 속에서 중요한 본질을 선택하고 이를 재구성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새롭게 그려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미메시스는 예술뿐 아니라 인간의 학습 과정에도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모방을 통해 배우는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의 행동을 따라하며 언어와 사회적 규범을 배우는 것처럼, 자서전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통찰을 이끌어내는 학습의 연장선입니다. 자서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하는 독창적 작업입니다.
삶의 모방에서 본질로: 어거스틴의 고백록 사례
자서전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이 거울은 단순히 외형을 비추는 평범한 거울이 아닙니다. 자서전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복제하지 않습니다. 미메시스의 관점에서 보면, 자서전은 삶 속의 의미와 본질을 골라내어 새로운 이야기로 재구성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미메시스의 훌륭한 사례로 떠오릅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 방황과 죄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한 과정을 기록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단순히 자신의 과거를 나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구속하심이라는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특히 배를 타고 도망쳤던 일이나 친구들과 배나무를 훔쳤던 사건처럼 사소해 보이는 이야기도,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했던 죄책감과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중요한 사건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예컨대, 배나무를 훔친 일화에서 어거스틴은 단순히 배가 탐이 나서가 아니라, 죄를 저지르는 자체의 쾌락을 추구했던 자신의 타락한 본성을 고백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그가 죄의 본질을 깨닫고 회심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는 그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과정으로 연결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거스틴은 자신의 어머니 모니카와의 관계를 통해 신앙의 본질과 가족 간의 사랑을 깊이 탐구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끈질긴 기도와 사랑은 단순히 개인적인 경험을 넘어, 신앙 공동체와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인간 관계를 변화시키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예시입니다. 이처럼 자서전은 삶의 모든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미메시스처럼 취사선택을 통해 '자신을 자신이게 만든 것'을 찾아내는 작업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단순한 회고가 아닌 창조적 신앙 고백의 과정이었으며, 그의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에게도 보편적인 통찰과 영적 성장을 제공했습니다.
자서전 쓰기의 예술적 가치
자서전은 단순히 개인의 삶을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 경험을 드러내는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이 진정한 이데아를 추구했듯, 자서전은 한 인간의 삶 속에서 인간 본성과 진리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데아란 플라톤 철학에서 모든 사물의 근원적이고 이상적인 형태를 뜻합니다. 그는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현실은 이데아의 불완전한 모방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미메시스를 학습과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로 보았던 것처럼, 자서전 쓰기는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이 그랬듯, 자서전을 읽는 독자는 글쓴이의 이야기를 통해 공감과 통찰을 얻고, 글쓴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자서전은 개인의 이야기가 타인의 삶과 연결될 수 있는 다리가 됩니다. 예를 들어, 전쟁 속에서 생존한 한 사람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역사적 증언이자 인류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새로운 시각으로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가집니다. 자서전은 단순히 자신을 위한 기록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고 변화를 이끄는 강력한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미메시스로 자서전 쓰기, 우리의 삶을 재해석하다
미메시스는 단순히 모방이 아니라 창의적 재구성입니다. 예를 들어,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어떤 이는 단순히 사실을 나열하는 대신, 자신의 가장 깊은 슬픔이었던 상실의 순간을 재구성하여 그것이 어떻게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 드러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도 이러한 창의적 재구성이 잘 드러나는데, 그는 죄를 단순히 고백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변화와 하나님의 은혜를 연결하여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는 이야기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자서전 쓰기는 우리의 삶을 미메시스의 렌즈를 통해 새롭게 보는 작업입니다. 과거의 나를 돌아보고, 현재의 나를 이해하며, 미래의 나를 꿈꾸게 합니다.
자서전은 또한 자신을 치유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평화를 찾고, 더 나은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자서전은 단순한 기록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것은 삶의 본질을 찾고, 자신만의 진실을 이야기하며, 타인과 교감하는 특별한 예술 작품이 됩니다. 자서전을 쓰는 모든 이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창조하는 예술가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처럼, 미메시스의 철학이 담긴 자서전 쓰기는 단순한 글쓰기를 넘어 자신의 존재를 재발견하는 여정입니다.